2026.03.05 (목)

  • 맑음동두천 -1.7℃
  • 맑음강릉 1.2℃
  • 맑음서울 1.6℃
  • 박무대전 0.4℃
  • 구름많음대구 1.3℃
  • 맑음울산 3.0℃
  • 박무광주 3.5℃
  • 맑음부산 6.3℃
  • 맑음고창 -0.5℃
  • 구름많음제주 7.3℃
  • 구름많음강화 -0.5℃
  • 맑음보은 -2.3℃
  • 맑음금산 -1.9℃
  • 맑음강진군 0.5℃
  • 맑음경주시 -0.3℃
  • 구름많음거제 4.5℃
기상청 제공

시민단체



[뉴스인포토닷컴] 중앙고등학교 애국동지회(회장 정병우) 3.1운동 107주년 대국민 성명서 발표! (첨부), 북촌은 3·1독립 운동의 최전선 기지 중앙학교 숙직실, 3·1운동 모의 기지로.. 경성(서울) 북촌의 계동 1번지 중앙학교, 밤마다 비밀 회합, 3.1 독립선언 배경 산실. 분열된 국력 통합에 앞장설 것!, 법치와 자유와 정의가 완성될 때까지 이재명 정권의 오만함과 반민주적 정책에 맞서 준엄하게 규탄, 싸워 나간다!

ㅡ 북촌은 3·1독립 운동의 최전선 기지
ㅡ 중앙학교 숙직실, 3·1운동 모의 기지로..
ㅡ 경성(서울) 북촌의 계동 1번지 중앙학교,
ㅡ 밤마다 비밀 회합, 3.1 독립선언 배경 산실.

[뉴스인포토닷컴] 
중앙고등학교 애국동지회(회장 정병우) 
3.1운동 107주년 대국민 성명서 발표! (첨부),
ㅡㅡㅡㅡㅡ
북촌은 3·1독립 운동의 최전선 기지
중앙학교 숙직실, 3·1운동 모의 기지로..
경성(서울) 북촌의 계동 1번지 중앙학교,
밤마다 비밀 회합, 3.1 독립선언 배경 산실.
ㅡㅡㅡㅡ
분열된 국력 통합에 앞장설 것!, 
ㅡㅡㅡㅡ
법치와 자유와 정의가 완성될 때까지 
이재명 정권의 오만함과 반민주적 정책에 맞서 
준엄하게 규탄, 싸워 나간다!
ㅡㅡㅡㅡㅡ
3.1절 107주년 기념식, 종로구 계동 중앙고 3.1기념관 앞,
<중앙고등학교애국동지회>.
ㅡㅡㅡㅡㅡ
뉴스인포토닷컴. 글.정리. 사진 = 주동식 사진전문기자.
ㅡㅡㅡㅡㅡㅡ




ㅡ 북촌은 3·1독립 운동의 최전선 기지, 
ㅡ 중앙학교 숙직실, 3·1운동 모의 기지로,
ㅡ 경성(서울) 북촌의 계동 1번지 중앙학교
ㅡ 밤마다 비밀 회합, 3.1 독립선언 배경 산실.








         중앙고등학교애국동지회 정병기 신임 회장은 3.1절 107주년을 맞아 3.1 독립운동 최전선 기지로, 독립선언 배경 산실인  서울 북촌 계동 1번지 중앙중고등 교정내 3.1운동 기념관 앞에서 애국동지회 회원 50여 명이 모여  기념식을 오전 10시부터 진행하였고,  중앙고 총동문회 ( 총동문회장  조소현 / 종합법률 로서브 대표 변호사)는 중앙고 강당에서 500여 명의 동문이 참석한 가운데 “ 3.1절 만세 운동”을 재현하고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 시설인 3.1운동 책원비 헌화식을 이어 진행하고, 동문들과 가족들은 삼청공원 산행 행사를 실시했다.




















    이날 3.1절 애국동지회 기념식에서 정병기 회장은 인사말에서  1919년 3.1독립 운동은 나라를 잃은 국민들이, 국혼을 되찾기 위해 일제에 맨 몸으로 맞서  싸웠던 고귀한 독립 운동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 칼에 쓰러졌고,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순국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희생 당하신 고귀한 순국선열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고 말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107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국론이 분열되어 혼란한 상황에 놓여 있다 말하고, 최근 지난 10여 년 이상 진행되어온 아스팔트 애국 시민운동은 나라의 근간을 허무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아들딸 자녀 세대에게 보다 나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나선 어른 세대 시민들의 숭고한 애국운동이라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반국가 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우는 애국 시민운동임을 재차 강조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법이 무너지고 자유 정의 진실이 무너진 곳에 거짓 선동 불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도, 종고의 자유도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도 감시 당하고 있습니다.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에 장악된 언론은 가짜 세상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선전선동 왜곡을 통해 진실은 은폐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선거 부정 의혹이 만연한 가운데,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무기 징역을 선고했으며, 총리 장관 장성 고위공직자를 대거 구속시켰습니다. 4성 장군 등 많은 군인들을 퇴역시켰고, 군 경험이 없는 방위 출신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여 노골적으로 군을 능멸하고 있으며 방첩대 해체, 국가보안법 폐지 등  명예를 앞세우는 군인들을 능멸해 사기를 급격히 떨어뜨리고 , 군 조직 해체 작업이 시행되고 있으며 나아가 한미 군사훈련 불참 등으로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세력이 국가 안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나라입니다.
이게 나라입니까?
이것이 국민을 위한 바른 정치입니까?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대한민국은 애국 시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아직 버티고 있다 말했다.

우리 중앙고등학교애국동지회는 초대 변원석 회장의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동지회를 설립하셨고, 현재까지 타 고등학교 동지회보다 인원수나 활동면에서 모범적으로 앞서 나가고 있다 말했다.
 
이어 2대 신희순 회장, 3대 노영우 회장의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185명의 회원으로 각종 애국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회원들을 향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구호를 외치며 인사말을 마쳤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3.1절 107주년 중앙고등학교애국동지회 성명서 > 

1908년 6월1일 일제의 침략음모가 노골화되어 민족의 운명이 촌각에 달려있었던 구한말, 인촌 김성수 선생께서는 오직 교육만이 이 나라를 보존 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하시면서, 구국정신으로 중앙학원을 설립하셨다.

그러나 일본제국은 1910년 칙령 제318호로 “대한제국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칭한다.”는 강령으로 조선총독부로 개칭하여, 국가에서 식민지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일본의 폭정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죽음도 불사하고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맨주먹으로 일본군과 대적 하였으니,이는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없는 위대함의 표상인 사자후였다. 
 
대한민국 만세소리는 세계만방에 독립국임을 일깨워주었고, 우리 민족의 기상과 얼을 만천하에 외침으로서, 단결된 힘과 저력은 자주민족임을 성토한 것으로써 국권회복을 바라는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선조들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자유민주주의는 아직도 성숙되지 않은 채, 한반도의 운명은 여전히 남북으로 나뉘어 갈등을 겪고 있으며, 성숙해야 할 이 땅의 문화는 일부 사회주의 좌파들에 의해 정권이 지배되고 있으니, 국민들이 마음 놓고 살수 없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핵무장한 북한으로부터 국가생존권을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국가안보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워 국제경쟁력까지 쇠약한데도, 이재명 정권은 노란봉투 법까지 만들어, 민노총의 잦은 파업을 방관하여 우수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지경으로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이재명 정권은 오직 정권연장을 위해 삼권분립 제도를 말살하고, 헌법조차 자신들 목적에 맞게 뜯어고치려는 계략을 획책하고 있다. 

3.1운동 107주년을 맞이하여 중앙고등학교 애국동지들은 분열된 국력통합에 앞장설 것이며, 법치와 자유와정의가 완성될 때까지 이재명 정권의 오만함과 반민주적 정책을 준엄하게 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1. 이재명 정권은 3.1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반민주적 강압 독재정치를 즉각 중단하라.

1. 이재명 정권은 좌편향 정책을 철회하고,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사업에 대못질하는 노란봉투 법 정책을 당장 중단하라

1. 이재명 정권은 정통성도 없고, 정당성도 없으며, 그 목적자체가 심히 불순한 각종 헌법개헌을 통한 정권 재창출 정책을 당장 중단하라

1. 이재명 정권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자유평화를 위하여 종전선언이란 감언이설에 준동하지 말고, 국방력을 튼튼히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더 이상 북한이 남한을 얕보지 못하도록 국가안보정책을 강화하라.

      2026년 3월 1일
 중앙고등학교 애국동지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기록으로 본 3.1 독립선언 배경과 주요 인물 >

중앙학교 숙직실, 3·1운동 모의 기지로… 밤마다 비밀 회합
  
1917년 11월 북악산 자락 아래에 들어선 중앙학교 본관(가운데)은 민족운동가들을 양성하는 장안의 명소가 됐다. 본관 오른쪽 아래로 3·1운동을 모의한 숙직실이 있다. 중앙고교 제공

경성(서울) 북촌의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수목이 울창한 삼청동 산비탈에 자리 잡은 2층 규모 붉은 벽돌집 학교는 장안의 명물로 부상했다. 1917년 11월 오로지 민족 자본만으로, 그리고 선생과 학생들이 직접 터를 닦고 돌을 나르는 등 한민족의 열정과 땀으로 완공한 새 교사(校舍)였다.(‘매일신보’ 1917년 12월 4일자)


학교 설립자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직접 고른 터였다. 뒤로는 북악산의 정기를 받고 앞으로는 경성 장안을 한눈에 굽어보면서 학생들의 호연지기를 기르려는 인촌의 의지가 실린 명당이었다.

선생과 학생은 모두 머리를 짧게 깎았다. 300명의 학생들은 해군장교 복장과 유사한 교복과 검은 천을 두른 교모를 착용했다. 일제에 대한 항거의 인상을 진하게 풍기는 두발과 제복이었다. 민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중앙학교가 유명해지자 일본 관리들 사이에 “누가 중앙학교를 허가해 주었느냐”며 책임 문제가 불거질 정도였다.(‘고하 송진우 전기’)

교사들의 진용 또한 화려했다.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당대의 대가들, 김성수 송진우 최두선 이강현 현상윤 나경석 등 일본 유학을 한 쟁쟁한 실력파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설립자 인촌은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치는 평교사로 근무했고, 교장인 고하 송진우(1890∼1945)는 자신의 월급보다 더 후하게 교사들을 대우했다. 조선인 사회가 인촌과 중앙학교에 대해 기대를 크게 가질수록 일제 총독부의 감시와 경계는 강화됐다.(‘인촌 김성수전’)

사실 중앙학교는 교육광복(敎育光復), 민족갱생(民族更生)의 요람답게 민족 운동가들을 배출하는 양성소이자, 배일(排日) 독립의지를 키우는 근원지였다. 일제에 대한 테러로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김두봉,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중앙학교 출신이었다.(‘중앙백년사’) 또 중앙학교 학생들은 3·1운동이 전개되자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때 일제에 검거돼 체형을 받은 중앙학교 학생들만도 확인된 범위에서 30여 명으로 알려졌을 정도다.(‘인촌 김성수전’)



중앙학교 숙직실, 국내-해외 연결 거점으로

  
1919년 1월, 겨울의 삭풍 속에서도 ‘북촌의 명소’로 자리 잡은 중앙학교 교정은 미묘한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중앙학교를 찾아온 이후부터는 3·1운동을 모의하는 책원본부(策源本部)로 변신한 것이다.

교실 앞 운동장 동남쪽에 자리한 중앙학교 숙직실(당시 교장 사택으로 활용)은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져 있곤 했다. 설립자 인촌과 교장 고하, 교사인 기당 현상윤(1893∼?)이 함께 생활하며 민족의 미래를 설계했다. 또 외부에서 찾아온 지사들은 학생들이 바깥에서 일본 밀정의 미행을 감시하는 동안, 중앙학교 팀들과 함께 은밀하고도 활발히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인촌과 고하는 인근 김사용의 집(계동 130번지)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자연스럽게 인촌의 서울 거처 또한 식사를 빙자한 독립운동 회합 장소가 됐다. 해외 유학파들과 국내 지사들은 서울에 오면 으레 중앙학교와 인촌의 거처를 방문하곤 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여운홍(여운형의 동생)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독립청원 백만인 서명’을 받아오라는 밀명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뒤 곧장 찾은 곳도 인촌의 거처였다.(이경남, ‘설산 장덕수’). 여운홍 역시 중앙학교 출신이었다.

이처럼 북촌은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국내와 해외를 연결하는 거점이 됐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등 중앙학교 팀은 국내 독립운동은 그 성격상 어느 한두 개 종파나 단체의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내의 주된 민족세력이 모두 단결하여 거사를 하고, 국외에서 이에 성원을 보내는 활동이 가장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하 송진우 전기’)

이들은 먼저 천도교에 손을 내밀기로 했다. 송계백이 들고 온 2·8독립선언서(초안)를 설득용 ‘무기’로 활용했다. 현상윤은 송계백을 데리고 최린(1878∼1958)을 찾아갔다. 천도교 산하 교육기관인 보성학교 교장 최린은 현상윤과 송계백의 보성학교 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최린은 송계백이 내민 독립선언서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 천도교 수장 손병희(1861∼1922)에게 즉각 보고했다. 손병희는 일찌감치 이종일이 이끄는 천도구국단 등에 의한 정보망과 단결된 조직력으로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참이었다. 손병희는 이 선언서를 접하고서는 국내외 세력과 연대를 통해 민족적 거사를 벌이기로 최종 결심했다.

손병희의 동참 발언을 확인한 송진우와 현상윤 등은 즉각 최린의 집 내실에 모여 축배를 겸한 비밀회합을 가졌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의견을 대리하는 최린은 중앙학교 팀들과 함께 독립운동 거사의 주역으로 동참했다.

이들은 밤 깊도록 독립운동의 실행에 대해 구체적 계획과 방법을 논의했다. 우선 민족대표자 명의로 조선독립을 선언한 후, 그 선언서를 인쇄해 전국에 배포하고, 국민이 총동원된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해 조선민족의 독립 열망을 내외에 알리는 순서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론지었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공교롭게도 최린과 손병희 또한 모두 북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최린은 재동 68번지(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살고 있었고, 손병희는 가회동 170번지(현재 북촌박물관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이 운영하던 유심사(계동 43번지) 또한 북촌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래저래 조선조 이래 양반 집권층이 모여 살던 북촌은 3·1독립운동의 최전선 기지가 되었다.



최린: 1878년 함남 함흥 출생. 1904년 대한제국 황실 파견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1909년 메이지대 법학과를 졸업함.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한 후 천도교 산하의 보성학교 교장, 천도교 도령 등을 역임했으며 1938년 매일신보 사장을 지냄.

 
현상윤: 1893년 평북 정주 출생. 1913년 보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 1918년 와세다대 졸업. 귀국 후 중앙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며 3·1운동에 가담.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학교) 교장을 거쳐 1946년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냄. 6·25전쟁 중 납북됨.

임규: 1867년 전북 익산 출생. 1900년 일본 게이오의숙을 졸업한 뒤 1908년 최남선과 함께 귀국해 중앙학교 등에서 일본어를 가르침. 3·1운동 당시 48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 일본에 건너가 요로에 독립선언서 등을 발송.   (동아일보 안영배 기자 기사 참조) 














배너

배너
배너

동영상



칼럼

정치/사회

더보기


동성애/차별금지법

더보기

북한인권

더보기